오이에노마오스와 다프네
작성자 이복근 (211.♡.20.21)
■오이에노마오스(포도주에 열광하는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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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사람들은 양고기 꼬치구이를 ‘수블라키’라고 부른다. 아테네에서 수블라키를 주문해서 먹으려는데, 새카맣게 그슬린 채 양고기에 잔뜩 달라붙어 있는 나뭇잎 가루가 신경에 거슬렸다. 그래서 무슨 나뭇잎인지 물어 봤다. 놀랍게도 다프네(월계수)잎 가루라고 했다. 승리의 상징인 월계관은 월계수 가지로 만든 관이다. ‘계관시인(桂冠詩人)’의 명예를 상징하는 ‘계관’도 월계수로 만든 관이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엘레우시스에 이르는 약 22㎞ 남짓한 도로는 ‘히에로드로모스(Hierodromos)’라고 불린다. ‘거룩한 길(성도·聖道)’이라는 뜻이다. 엘레우시스(지금의 현지 발음은 ‘엘렙시나’)에는 곡물의 여신 테메테르의 신전 유적이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곡물의 여신 테메테르의 신전에서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신전에 이르는 길을 ‘거룩한 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엘레우시스에서 아테네로 들어오다 보면 ‘다프네’가 있다. 아폴론의 애인 다프네가 월계수로 몸을 바꾼, 눈물겨운 전설이 서려 있는 마을이다. 원래 이 마을에는 아폴론의 신전이 있었지만 기독교가 들어와 신전자리에다 세운 교회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런데 해마다 8월말에서 9월 중순이 되면 이 교회 주변 공터에서 ‘다프네 축제’라는 희한한 잔치가 벌어진다. 오후 7시반에서 밤12시 직후까지 벌어지는 무제한 포도주마시기 잔치다. 입장료는 약 9천원이다. 입장료만 내면 진홍빛 포도주를 얼마든지 마실 수 있다. 질(質)보다 양을 좋아하는 술꾼들을 위한 한시적(限時的) 천국이다.

그리스인들은,요리 먹을 때만 마시지 강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잔치에서만은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진홍빛 포도주가 약속하는 천국의 아이러니다. 그렇다면 광적인 포도주 축제가 왜 이곳에서 벌어지는 것일까. ‘다프네’라는 말은 ‘다포에네’, 즉 ‘핏빛’ ‘진홍빛’이라는 뜻이다. 다프네의 이름이 진홍빛 포도주를 연상시켰기 때문일까.

아득한 옛날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를 섬기던 마이나데스(주신을 섬기던 사람들)는 이곳에서 월계수 잎을 씹으면서 미친 듯이 포도주를 마셨다고 한다.


[그림]John William Waterhouse(英,1849-1917) ◈ Apollo and Daphne(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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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계수가 된 처녀 다프네

아폴론이 왕뱀 퓌톤을 죽인 직후,활쏨씨를 뻐기고 다닐 즈음의 일이다. 사랑의 꼬마 신 에로스가 한뼘도 안되는 활에다 시위를 매고 있는 모습이 아폴론에게는 우습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꼬마야, 무기는 무사들이나 쓰는 것이다. 활은 나같은 무사에게나 어울린다. 너는 사랑의 불을 잘 지른다니까 횃불이나 들고 다니는 게 어울리겠다.” 에로스(라틴 이름 ‘쿠피도’, 영어 이름 ‘큐피드’)가 발끈하면서 응수했다.

“당신의 화살이 왕뱀을 쏘아맞혔다면 내 화살은 당신을 맞힐 것입니다.” 에로스는 이러면서 화살 통에서 쓰임새가 다른 화살 두 개를 뽑았다. 하나는 사랑을 목마르게 구하도록 하는 예리한 금 화살, 또 하나는 사랑을 지긋지긋하게 여겨 도망치게 만드는 뭉툭한 납 화살이었다.

에로스는, 아폴론에게는 금화살을 날리고, 강의 신 페네이오스의 딸 다프네에게는 납화살을 날렸다. 이제 아폴론은 어떤 여성이든 그 여성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고, 다프네는 반대로 어떤 남성이든 그 남성을 보는 순간 넌더리를 내게 되어 있다. 인류사를 눈물로 적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에로스의 농간으로 시작된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아폴론이 처음 만난 여성은 다프네, 다프네가 처음 만난 남성은 아폴론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폴론은 다프네를 보는 순간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다프네를 보는 순간 아폴론의 가슴은, 타작마당에서 검불을 태우는 불길처럼 타올랐다. 밤길 가던 나그네가 버린 횃불이 잘 마른 울타리를 태우듯이 그렇게 타올랐다. 그러나 다프네에게는 정반대되는 일이 일어난다. 다프네는 다가오는 아폴론에게 견딜 수 없는 역겨움을 느끼고 도망치기 시작한다.

다프네는 달아났다. 바람보다 빠르게 달아났다. 아폴론이 따라가면서 하소연했지만 다프네는 걸음을 멈추지도, 하소연을 들어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다프네여, 달아나지 말아요. 비록 그대를 이렇게 쫓고 있기는 하나 나는 농사나 짓는 농투성이도, 가축이나 먹이는 양치기도 아니오. 나는 저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의 아들이오. 나는 미래를 꿰뚫어 보는 무신(巫神)이자, 수금(竪琴)을 잘 타는 악신(樂神)이오. 나는 활쏘기의 명수이나, 솜씨가 나보다 나은 자가 있어서 내 가슴에다 치유할 길 없는 상처를 입히고 말았소. 나는 의신(醫神)이오만, 이 사랑병을 고칠 약초는 없으니 이 일을 어쩌리요.” 다프네는 달아났지만 연약한 처녀의 발이 명궁 아폴론의 발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아폴론은, 숨결이 다프네의 목에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따라붙었다.

다프네는 힘이 다했는지 더 이상 달아나지 못했다.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지친 다프네는 아버지 페네이오스 강의 강물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아버지, 저를 도와주세요. 저를 괴롭히는 이 아름다움을 거두어 주세요.” 다프네는 기도를 채 끝마치기도 전에 정체모를 피로를 느끼면서 굳어져 갔다. 다프네의 그 부드럽던 젖가슴 위로 얇은 나무껍질이 덮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나뭇잎이 되고 팔은 가지가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힘있게 달리던 다리는 뿌리가 되고, 얼굴과 머리카락은 우듬지가 되었다. 곧 다프네의 모습은 나무껍질 아래로 사라졌다.

[그림]Lucas Cranach the Elder (獨,1472-1553)◈Apollo and Di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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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변해가는 다프네를 보고 절규하는 아폴로.
비통해 하는 아버지와 장난기 어린 모습의 에로스가 보인다.


다프네가 나무로 몸을 바꾸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무 둥치에 손을 댄 아폴론은 수피 아래서 콩닥거리는 다프네 심장의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월계수 가지를 다프네의 사지인 듯이 끌어안고 나무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나무가 되었는데도 다프네는 이 입맞춤에 몸을 웅크렸다. 아폴론이 속삭였다.

“내 아내가 될 수 없게 된 그대여, 대신 내 나무가 되었구나. 이제 내 머리에는 월계관이 오르고, 내 수금, 내 화살통에 그대의 가지가 꽂히리라.” 그러자 월계수는 가지를 앞으로 구부리고, 고개를 끄덕이듯이 잎을 흔들었다.

아폴론 이전 시대의 운동 경기 승리자들은 참나무가지 관을 머리에 쓰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아폴론 신앙이 대두되면서 이 참나무 관은 월계수 관, 즉 월계관으로 바뀐다.

마라톤 우승자가 머리에 쓰는 월계관은 나무가 아니라 처녀 다프네의 손가락이다. 그리스신화에는 나무로 몸을 바꾼 사람 이야기가 무수히 등장한다. 그런 신화를 몸과 마음으로 익힌 그들에게 나무와 사람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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