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는 신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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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복근 (211.♡.19.78) | 작성일 | 08-07-14 19:23 | ||
'상징'을 알아야 '유럽건축'이 보인다
1999년 9월20일, 센강 한가운데 밤섬처럼 떠 있는 시테섬으로 들어갔다. 나의 동행은 거대한화강암 구조물을 나에게 설명하려고 했다. 나는 그를 저지했다. 그리고는 그 구조물이 나에게 건네는 말에귀를 귀울였다. 날개 달린 한 노인이 오른손에 거대한 서양 낫을 들고 앉아 있다. 그렇다, 낫이다. 거대한 강철 낫이 모든 것을 자르듯이, 때가 되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들을소멸시키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 이미지다. 크로노스는 우라노스(하늘)의 아들이다. 거대한 낫으로제 아버지의 생식기를 잘랐던 바로 그 크로노스다. 크로노스는 제우스의 아버지다. 태어나는 족족아들 딸을 삼키던 신, 마침내 막내아들 제우스에 속아 그동안 삼켰던 아들 딸을 줄줄이 토해낸 신이다. AEON(URANUS) WITH ZODIAC & GAIA Museum Collection: Staatliche Antikensammlung und Glyptothek, Munich, Germany Catalogue Number: TBA Type: Mosaic Context: From villa in Sentinum, Italy Date: -- Period: Imperial Roman SUMMARY Aion, the god of time, stands turning the wheel of heaven inscribed with the signs of the zodiac. The god was identified with both Khronos (Time) and Ouranos (Heaven). Beneath him reclines Gaia (Mother Earth) attended by the four Karpoi (Fruits) of the seasons - from left to right: Eiar (Spring), Theron (Summer), Phthinoporon (Autumn) and Kheimon (Winter). 여기에서 ‘크로노스’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크로노스 아래에는 해시계 문자판이 있다. 보는 사람들이 날개 달린 노인이 시간의 신 크로노스인 줄 알아보지 못할까 봐 친절하게도하나의 상징을 덧붙여 준 것이다. 이로써 날개 달린 노인은 시간의 신 ‘크로노스’임에 분명해진다. ASTRAPE as Astraia (constellation Virgo), the goddess of justice Museum Collection: The J Paul Getty Museum, Malibu, California, USA Catalogue Number: Malibu 86.AE.680 Beazley Archive Number: N/A Ware: Apulian Red Figure Shape: Loutrophoros Painter: Attributed to Painter of Louvre MNB1148 Date: ca 350 - 340 BC Period: Late Classical SUMMARY Detail of figure Astrape (Lightning Bolt). Astrape stands beside the throne of Zeus, bearing his thunderbolt in her hand. She is depicted as Astraia (constellation Virgo), the goddess of justice, with the usual attributes of a star-god: wings, flaming torch and shining aureole. 불 법무부에 둥지 튼 크로노스-아스트라이아 오른쪽의 여인은 오른손에는 칼, 왼손에는 천칭을 쥐고 서 있다. 누구인가. 아스트라이아다. 이치의 여신 테미스의 딸이다. 제우스가 개판이 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대홍수를 일으키기 직전, 머리를 풀고 이 땅을 떠나 버린 여신이다. 이 여신은 왜 천칭을 들고 있는가. 하나의 주장과 그 주장에 반대되는 주장의 무게를 달아주기 위해서다. 칼은 왜 들고 있는가. 치우치게 주장하는 자를 벌주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이 여신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 이치의 여신 테미스의 뜻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는 정의와 법이다. 정의와 법의 여신이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와 법의 여신 아스트라이아가 어쨌다는 말인가. 신화의 상징에 눈밝은 사람들도 좌절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될 듯하다. 하지만 이 구조물의 설계자와 시공자는 친절하다. 이 구조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럽, 특히 프랑스의 설계자들과 시공자들은 친절하다. 그들은 구조물로 하여금 스스로 역할을 설명하게 한다. 눈을 부릅뜨면 구조물의 설명이 보이고, 귀를 기울이면 구조물의 친절한 설명이 들린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와 법의 여신 아스트라이아의 돋을 새김 밑에 한 줄의 라틴어 문장이 있다. “Hora fugit Stat Jus” 그들은 왜 라틴어를 쓰고 있을까. 이렇게 써놓으면 라틴 민족(Latin race)들, 즉 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루마니아 등의 민족이 해독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그리스어·라틴어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다. 자국어를 쓰면 국경만 넘어도 미지의 언어가 되지만 그리스어나 라틴어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 상호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사어(死語)가 되어 버린 고전 그리스어·라틴어가 의학용어·분류학용어로 지금까지도 사용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사어는 죽은 언어이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 펄펄 살아 움직이는 말로, 중요한 일의 경계를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배 타고 가다가 강물에 칼을 떨어뜨렸다고 해서, 뱃전에 금을 긋고 잠시 기다렸다가 칼을 찾으러(각주구검·刻舟求劍) 물에 뛰어드는 자는 어리석다. '신화적 상상력'메마른 예술의전당선 낙담 “시간은 날지만 법은 부동이다(Time flies, but Justice stands still)” 이런 뜻이다. 그 구조물이 프랑스 법무부 건물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건물일 수 있는가.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겠지만 나는 잘난 체하고 싶어서 내 동행의 설명을 제지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구조물과 둘이서만 말을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나 혼자서 내가 배운 상징의 의미로서 세계를 만나고 싶었던 것뿐이다. 1999년 9월20일, 나는 파리의 한 아름다운 건물 앞에 섰다. 지붕 위로는 금빛 뤼라, 즉 수금(竪琴)을 든 남성의 청동상이 보였다. 나는 그가 예술의 신 아폴론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옆에는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말과, 그 말을 잡도리하는 여성의 청동상이 있었다. 나는 그 말을 헬리콘 산 꼭대기에다 발길질로 영감의 샘 히프크레네(‘말의 샘’이라는 뜻이다)를 팠다는 천마(天馬) 페가소스일 것으로 짐작했다. 그렇다면 말을 잡도리한 그 여신이 누구이겠는가. 나는 예술의 여신들, 즉 무사이(영어로는 ‘뮤즈’)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건물 옆으로는 아홉 무사이들이 새겨져 있었다. 아홉 무사이들은 각기 서사시·서정시·희극·비극 등 맡은 직분을 상징하는 필기구, 혹은 가면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그 건물 앞의 가로등은 민짜 기둥 위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여성들의 청동상이 가로등을 하나씩 머리에 이고 있었다. 여성들 이마에는 초승달, 혹은 별 모양의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아름다운 램프포스트(lamppost)를 보면서 나는 그 여성들이 아틀라스의 딸들인 ‘플레이아데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플레이아데스는 ‘묘성(昴星)’이라고 번역된다. 나는 묘성 무리가 그 건물을 밝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동행했던 안내자는 그 건물이 어떤 목적으로 지어진 것인지 나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파리의 오페라 극장이었다. 나의 짐작 중 틀린 대목은 램프포스트로 서 있는 여성들이 ‘플레이아데스’가 아니라 ‘베스탈’이라는 것 뿐이었다. ‘베스탈’은 불씨의 여신 ‘베스타’(그리스 신화에서는 ‘헤스티아’)를 섬기는 신녀들이다. 신화흔적 더듬어 신들과 해후하는 큰 기쁨 동행하던 안내자는 퍽 신기해했다. 하지만 신기할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건축가가 어떤 구조물을 지을 때는,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 구조물로 하여금 자신의 역할을 설명하게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훌륭한 구조물들은 나는 극장이오, 나는 국회의사당이오, 나는 예술의전당이오 이렇게 발언한다고 믿는다. 나와 동행하던 안내자는 신기해 할 것이 없었다. 파리 오페라극장을 지은 건축가는 신화의 상징을 동원하여 그 구조물로 하여금 멀리서 온 나에게, 나는 극장이오 하고 말하게 한 것에 지나지 않고, 나는 그 말을 알아들은 데 지나지 않는다. 서울 우면동 예술의전당 앞에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나는 절망했다. 딱 하나 있기는 했다. 멀리서 보면 신선로 같기도 하고 시베리아 샤먼(巫覡)의 유르타(천막집)같기도 한 극장의 모양이었다. 샤머니즘도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강력한 영향권에 들어있는데 그것이 샤먼의 유르타를 연상시키고 있다면 얼마나 근사한 것인가 싶었다. 파리 오페라극장 위에 서 있는 아폴론은 예술의 신인 동시에 무속(巫俗)의 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물어보고 나서야 나는 그것이 유르타가 아니라 갓을 연상시키는 구조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때부터 구조물은 나에게 어떤 말도 걸지 못했다. 나의 신화적 상상력은 내 나라 예술의전당에서 깊은 좌절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문화 현상에서 신화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 흔적을 거슬러 올라가 신들과 만나는 공부를 ‘신화, 거꾸로 읽기’, 혹은 ‘역류의 신화학’이라고 부른다. <이윤기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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