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메다 구해낸 페르세우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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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복근 (211.♡.20.43) | 작성일 | 08-06-19 19:03 | ||
1975년 여름, 서울 충정로에 있던 잡지사 기자로 일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른 점심 식사 끝내고,편집실로 통하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있었는데, 위에서 거대한(?)물체가 계단을 굴러내려왔다.
계단 위에서 지르는 여성들 비명이 낭자했다. 굴러내려온 물체는, 체구가 비교적 큰 여기자였다. 내 머리에 퍼뜩 떠오른 것은 그 여기자를 택시에 태워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계단에서 굴러내려온 여기자를 안고 택시가 설만한 곳으로 뛰었다. 다른 여기자 하나가, 계단에서굴러떨어진 여기자의, 굽이 매우 높은 뾰족구두(그날 사고의 주범)를 주워들고 뒤를 따라왔던 것 같다. 정신없이 달리고 있는데, 문제의 여기자가 내 품(?)안에서 속삭였다. “왜 이래요? 아무렇지도 않은데….”그제서야 나도 정신이 들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냐고 물어 보았다. 여기자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대답했다. 내가 살며시 내려놓자 여기자는, 맨발로 몇 걸음 걸어 보는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뒤따라온 다른 여기자가, 문제의 여기자의 발에서 벗겨진 뾰족구두를 길바닥에 내려놓았다. 문제의여기자는 그 구두를 꿰어신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른 여기자들과 단골 음식점쪽으로 걸어갔다. 미녀 앞에만 서면 '영웅'이 되고 싶다? 나의 체력이 내 또래 남성의 평균 체력을 약간 앞서기는 했다. 하지만 다른 여기자들에 견주어 체구가 큰 문제의 여기자를 안고 200여m 거리를 질주할 수 있을 만큼 빼어난 것은 아니었다. 확인할 길이 없었지만, 나의 체력은 그 여기자를 겨우 안아올릴 수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나는 추측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자를 안고 200여m를 질주했다. 그런 괴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나는 그 답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25년 전에 있었던 그 사건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25년전 충정로에서 벌어진 어떤 해프닝 문제의 여기자가 그날 신고 있던 뾰족구두는, 패션 쇼에나 등장할 법한 그런 구두이지, 잡지사 취재 기자가 신을 법한 그런 구두가 아니었다. 여기자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부적절한 방법으로 뽐내려 하다가 그런 사고를 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는 영웅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 역시 동료 기자들 앞에서 힘을 뽐내고 싶어했음이 분명하다. 나는, 거의 무의식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괴력을 낼 수 있었을 것으로 확신한다. 나는 그날의 사고 현장에서 가장 저급한 형태의 영웅 신화가 재현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페르세우스신화는 가장 오래된, ‘미녀를 구하는 영웅 신화’가운데 하나다. 자, 어느 나라의 공주가 아름다움을 뽐내다가 신들의 미움을 산다. 신들은 괴물을 보내어 공주가 속한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임금은 점을 쳐본다. 공주를 산 제물로 바쳐야 신들의 미움이 풀릴 것이라는 점괘가 나온다. 공주가, 괴물의 먹이가 되려는 순간… 미녀를 구하는 영웅 신화의 얼개는 대개 이렇다. 공주는 아름다울까? 물론 아름답다. 공주는 괴물의 먹이가 될 것인가? 물론 되지 않는다. 남성들의 집단 영웅 심리가 공주의 죽음을 방관하지 않는다. 이 집단 영웅 심리는,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한 영웅을 등장시켜 공주를 구하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공주는 영웅의 아내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이 바로 초등학생들도 잘 알고 있는, 전형적인 해피엔딩 영웅 신화다. >> 그림 설명 (위) 요아힘 브테발, 안드로메다를 구하는 페르세우스 1611, 캔버스에 유채, 180x150㎝, 파리, 루브르 박물관 왼편 바위에는 안드로메다가 거의 전라로 묶여 있고 오른편 하늘에서는 페르세우스가 괴물을 공략하고 있다. 안드로메다의 자세는 지금의 급박한 상황과는 거리가 먼, 매우 한가하고 에로틱한 자세다. 이 시기 매너리즘 미술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이미지라 할 수 있는데, 귀족 취향을 반영하는 매너리즘 미술은 주제나 내용보다는 스타일과 감각에 더욱 관심을 쏟은 미술이다. 안드로메다의 발아래 놓인 것은 조가비들과 해골이다. 조가비들의 다채로운 형태와 화려한 색채는 이곳이 해안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과도하고 장식적이다. 그 장식성으로 말미암아 안드로메다의 발치에 놓인 해골들마저 그리 끔찍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안드로메다의 피부가 조가비의 속껍질과 같은 색채와 광택을 띠는 것도 화가의 의도적인 장식 취향을 생각하면 그리 낯설지 않다. 이 모두는 자개장처럼 수집가의 거실을 화사하게 빛내주기 위한 것이다. 영웅 페르세우스와 괴물은 안드로메다와 달리 비교적 역동적으로 표현돼 있다. 하지만 화려하고 장식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크게 다를 게 없다. 영웅이나 괴물이나 무지갯빛의 다채로운 색채로 뒤덮여 있는데, 페르세우스가 좀더 진한 붉은색과 파란색을 띠고 있다면, 괴물은 좀더 밝은 붉은색과 초록색을 띠고 있다. 푸른빛을 띠며 아련히 멀어지는 풍경이 시적인 감상미를 전해준다. (아래) 피에로 디 코지모, 안드로메다의 구원(부분) 1515년경, 나무에 유채, 70x123㎝,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피에로 디 코지모는 워낙 괴짜인데다 은둔자 경향이 있어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도 다른 화가들과 작품 경향이 크게 구별됐다. 그의 그림은 마치 이야기 이해를 돕기 위해 그려진 일러스트레이션인양 신화나 전설을 담을 때 더욱 활력을 띠고 흥미롭게 전개됐다. 안드로메다 이야기를 그린 이 그림도 굽이굽이 펼쳐지는 이야기에 발맞춰 매우 아기자기한 화면을 자랑한다. 부분 화면을 넘어선 전체 화면을 보면 페르세우스가 두 번이나 그려져 마치 영화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듯한 느낌마저 얻게 된다. 바위의 고목 그루터기에 양손이 묶인 안드로메다는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처럼 비통한 이미지를 선보인다. 에로틱하게 교태를 자랑하는 브데발의 안드로메다와는 차원이 다르다. 흰 천을 두르고 있어 그의 순결함이 강조된 한편 예수와 같은 죄 없는 희생자의 이미지도 자아내고 있다.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 교리가 묘하게 만난 느낌이다. 하지만 화가는 안드로메다 공주와 괴물을 무찌르는 영웅 페르세우스 못지않게 지대한 관심을 화면 전경의 인물에도 쏟고 있다. 그 주인공은 케페우스 왕과 카시오페이아 왕비이다. 그들이 애통해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인데, 누구보나 자신의 미모를 자랑한 탓에 딸을 사지로 몬 카시오페이아 왕비의 통곡 장면이 애절하게 다가온다. 그가 윗옷을 벗은 것은 슬픔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역시 당대의 미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도 하겠다. 메두사의 목을 자른 페르세우스는 하늘을 날아 케페우스왕이 다스리던 이디오피아에 이르렀다.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페르세우스의 눈에, 바위에 묶인 처녀가 보였다. 아름다운 공주 안드로메다였다. 얼굴이 창백한 처녀는 사슬에 묶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지 않았고,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지 않았더라면 페르세우스도 그저 대리석상이라고 여겼을 터였다. 페르세우스는 처녀의 아름다움에 어찌나 놀랐던지 날개 달린 신발로 날갯짓하는 것까지 잊을 뻔했을 정도였다. 페르세우스가 말을 걸었다. “처녀여! 사랑하는 이들을 하나로 묶는 사슬에 묶여 있어야 마땅한 그대가 그런 쇠사슬에 묶여 있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쇠사슬 묶인 공주,바다요정에 제물로 안드로메다는, 처녀들이 그렇듯이, 수줍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페르세우스가 되풀이해서 묻자, 잠자코 있으면 페르세우스가, 처녀 자신의 입으로는 차마 말못할 잘못이라도 저지른 줄 오해할까봐 사연을 털어놓았다. 어머니인 아름다운 왕비 카시오페이아가, 미모를 뽐내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감히 바다요정들의 아름다움에 견준 것이 화근이다. 이 때문에 화가 난 바다요정들이 거대한 괴물 케투스를 보내어 해안 마을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케페우스왕이 어떻게 하면 바다요정들의 노기를 가라앉힐 수 있을지, 신들의 뜻을 물었다. 딸 안드로메다를 바쳐야 한다는 신탁이 나왔다. 그래서 자신이 이렇듯이 희생 제물이 되어, 괴물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 이것이 아름다운 처녀 안드로메다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연이었다. 처녀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괴물이 나타났다. 괴물은 넓은 가슴으로 물살을 가르며 돌진해 왔다. 처녀의 부모도 그 곁에 있었다. 부모는 발을 구르며 애만 태웠는데 특히 어머니 쪽이 더 그랬다. 페르세우스가 외쳤다. “눈물은 나중에 얼마든지 흘릴 수 있습니다. 급한 것은 처녀를 구하는 일입니다. 나는 제우스 신의 아들이며, 메두사의 정복자입니다. 내 힘으로 공을 세우고 공주를 구할 경우 나는 상으로 처녀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어느 부모가 마다하랴? 이미 괴물은, 팔매질의 명수라면 돌을 던져 맞힐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와 있었다. 페르세우스는 몸을 솟구쳐 하늘로 날아올랐다. 오비디우스는 영웅이 괴물을 제압하는 광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들이 써가는 '영웅신화'는 계속된다 “…높은 하늘에서 햇볕을 쬐다가 뱀을 발견한 독수리가 수직으로 내리꽃혀 그 목을 물고 비틀어 뱀이 독니 쓸 틈을 빼앗아버리는 것처럼, 페르세우스도 그렇게 괴물의 등줄기로 내리꽂히며 괴물의 겨드랑이를 칼로 찔렀다. 상처입은 괴물은 하늘 높이 몸을 솟구치는가 하면 바닷속으로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그러다 괴물은, 사냥개 무리에 둘러싸인 멧돼지처럼 사방으로 몸을 돌리며 영웅을 공격했다. 그러나 영웅은 날개 달린 신발 덕분에 그런 공격을 쉬 피할 수 있었다. 영웅은 괴물의 비늘 사이로 맨살이 보일 때마다 옆구리, 배 그리고 등에서 꼬리 쪽으로 내려가며 닥치는 대로 푹푹 찔러 상처를 입혔다. 괴물이 콧구멍으로 피 섞인 바닷물을 뿜었다. 날개 달린 신발도 괴물의 피에 젖어 영웅에게는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영웅은 파도 사이로 고개를 내민 암초 위로 올라가, 칼바위에 몸을 의지하고는 가까이서 떠오른 괴물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해변에 모여 있던 군중은, 산이 울릴 만큼 큰 소리로 환성을 올렸다. 처녀의 부모는 기쁨에 겨워 이 장래의 사위를 껴안고는, 케페우스 일문(一門)의 구주(救主)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괴물을 죽인 페르세우스는 사슬을 풀고 처녀를 안고는 바위에서 내려왔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흔히‘영웅이 사라진 시대’라고 불린다. 그래서 ‘금기없는 세대’에게 들려주는 고대의 영웅 이야기는 전체주의의 잠을 깨우려는 의도라는 혐의가 돌아올 위험이 없지 않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나는‘영웅’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만‘옛 형태의 영웅’이 사라진 것일 뿐이라고 믿는다. 괴물 케투스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도 서울의 충정로에는 아름다움을 뽐내려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처녀들이 있고, 그런 처녀들에게 힘을 뽐내려는 청년들이 있다. 어쩌면 괴물 케투스는, 영웅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새 세대의 완강한 믿음으로 모습을 바꾸고 오늘도 충정로를 어슬렁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윤기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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