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읽는다]황남대총·천마총에 밀려난 서러운 2인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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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복근 (211.♡.20.43) | 작성일 | 08-05-22 22:59 | ||
봉황대
봉황대는 단일 무덤으로는 경주에서 가장 큰 능이지만 아직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피장자를 알 수 없어 '능(陵)'이 아닌 '대(臺)'의 이름이 붙어 있다. 지름 82m·높이 22m 천년고도 경주서 가장 큰 무덤 형태·규모 통해 강력한 왕권 행사했던 진평왕릉 추정 주위 좁아 훼손 심해…상가 둘러싸여 일반인과 단절 경주에 발을 들여 놓는 사람들은 대부분 도심에 산처럼 큰 무덤들이 많은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그리고 경주에서 가장 큰 능은 어느 것일까 하고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규모에서 보면 경주에서 가장 큰 능은 봉황대다. 봉황대는 밑바닥 지름이 82m, 높이 22m로 하나의 능으로는 경주에서 가장 커 흡사 동산처럼 보인다. 쌍분으로 이와 맞먹는 크기로는 우리들에게 '황남대총'으로 알려진 98호 고분이 있다. 명칭으로 보면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에만 붙는다. 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무덤이다. 특히 봉황대는 아직 '대'라는 이름을 갖고 있어 공식적으로 능의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봉황대는 천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 경주의 분위기를 아직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신라 능이다. 이 무덤에 '능'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고 '대(臺)'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능이 하도 커 능에 대한 조사를 벌일 때 능으로 생각하지 않고 언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능은 아직 발굴되지 않아 피장자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신비감을 갖고 있다. 특히 이 능 위에는 고목들이 자라고 있는데 이들 나무들을 보노라면 인간의 부귀영화와 국가의 흥망이 모두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70년대 정부는 '경주종합계발계획'을 세우고 경주 사적지를 정비했다. 이 때 일부 능이 파헤쳐지고 능 주위의 마을들이 철거되고 또 능의 무너진 곳은 복구가 되었다. 그리고 능 위에 자라고 있는 나무들이 베어져 나갔다. 155호 고분과 98호 고분이 발굴되고 유적들이 산재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길들이 시멘트로 포장되고 또 귀중한 문화재들 역시 시멘트 발림을 하게 된 것이 이 무렵이다. 이 시기 봉황대 역시 주위 집들이 일부 헐렸고 능 주위의 논과 미나리꽝에는 잔디가 입혀졌다. 70년대만 해도 경주 곳곳에 봉황대로 불리는 동산이 많았다. 봉황대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었다. 신라 말기 고려 첩자가 잠입해 신라가 망하도록 하기 위해 경주의 지세를 거짓으로 봉황상이라고 속인 후 봉황이 날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봉황의 알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실제로 경주는 시가지가 봉황상이 아니고 배의 형상이 되어 인공으로 만든 봉황알처럼 생긴 동산이 너무 무거워 침몰했다는 얘기가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이 때 신라인들이 만들었다는 인공 산이 봉황대로 알려져 왔다. 경주에는 고분이 많은데 이들 대부분이 황오·황남·노서·노동동 등 도심에 있다. 이들 고분들은 일제강점기 조사가 되어 번호가 붙게 되는데 이중 제155호 고분이 유명한 천마총이다. 이후 70년대와 80년대가 되면서 우리 정부가 나서 이에 대한 조사를 다시 하게 되는데 조사 결과 이들 지역에는 지금까지 발굴된 고분 외에도 수백기의 고분이 땅속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천마총 맞은편 쪽샘 뒤의 황오·황남 고분군만 해도 당초 이곳에는 70여기의 고분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이들 고분위에 모두 집들이 들어서는 바람에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가 힘들게 되었다. 신라가 왕경에 대한 도시계획을 세우고 정비를 시작한 것은 삼국을 통일한 후인 7세기 후반이다. 당시 신라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모델로 한 도시를 만들어 도시전체가 바둑판 위의 눈금처럼 동서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길로 구획되었다. 그리고 계층 별로 사는 장소도 따로 마련했다. 따라서 이때 도시계획에 방해가 되는 작은 고분들은 자체적으로 정비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봉황대는 그동안 수난을 많이 겪었다. 6·25때는 경주 인근 영천에서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참호가 능 위에 만들어졌고 전후에는 보호시설이 전혀 없어 여름이면 시민들이 바람을 쐬기 위해 능위에 올라가고 더위에 지친 소들도 이 능위 나무에 묶여 한철을 보내면서 능을 훼손시켰다. 이런 훼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봉황대가 있는 곳은 경주에서도 제일 번화가다. 따라서 능 서쪽을 제외하고는 도심 상가들이 능 주위를 감싸고 있어 일반인들이 능을 잘 볼 수 없다. 또 밤이 되면 능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사방에서 야광을 비추고 있지만 주위에 상가가 많다보니 상가에서 쏟아지는 빛 때문에 고도의 분위기가 전혀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능은 큰데 반해 주위 공간이 좁은 것도 훼손의 요인이다. 따라서 인근에 있는 다른 능들이 도심의 공원 역할을 하고 있는데 반해 이 능은 제 몸 하나 추스르기가 어려울 정도로 공간이 좁아 보기에 안쓰럽다. 길 하나를 중간에 두고 서쪽에 있는 서봉총이 비교적 공간이 넓어 도심공원 역할을 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능이 도심에 있기 때문인지 능을 오르는 사람들도 많다. 능 사방으로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길이 만들어져 능이 흡사 가르마를 타고 있는 형상이다. 능의 형태로 보면 이 능은 아무 장식 없이 원형 토분으로 되어 있어 통일 신라 이전의 것이고 규모는 경주에서 가장 커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왕이 묻혔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이 능이 통일 신라 이전 53년간 재임하면서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했던 진평왕의 능으로 보기도 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능에서 장례식이 치러졌을 때 신라인 모두는 슬픔에 잠겼을 것이고 능 주위에는 왕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려는 인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은 이런 모든 것을 묻어 지금은 당시 호곡과 인파를 찾을 길이 없다. 대신 능 주위까지 들어선 식당과 술집을 드나드는 인파들을 보면서 인간의 무상과 역사의 허무를 느끼게 된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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