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연금술사' 헤르메스 | |||||
---|---|---|---|---|---|
작성자 | 이복근 (211.♡.20.43) | 작성일 | 08-05-13 19:07 | ||
액체는 무르다. 정형(定形)이 없는 무정형(無定形)이다. 그래서 액체는, 그것을 담는 그릇에 따라 그 모양이 결정된다. 금속은 단단하다. 정형이 있다. 그래서 금속은 액체 담는 그릇을 빚는데 유용하다. 수은(水銀)은 액체인 동시에 금속이다. 수은이라는 이름은 ‘액체로 된 은(銀)’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중세 연금술사들이 진사(辰砂)를 태워 처음으로 수은을 만들어내었을 때 붙인 이름은 ‘메르쿠리우스(Mercurius)’다. 영어로는 ‘머큐리(Mercury)’다. 메르쿠리우스가 누구인가. 헤르메스의 로마식 이름이다. 액체이면서도 금속인 수은에, 전령의 신, 관계의 신, 소통의 신, 촉매의 신 헤르메스의 이름을 붙인 것이 절묘하다. 수은은 다른 금속과의 친화력이 탁월한 금속이다. 인체에 매우 해로워 엄격하게 규제되는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금속제 생활용기에서 수은이 검출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恒星)이다. 태양 주위에는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9개의 행성(行星)이 있다. 스스로 하나의 행성이 되어 항성인 태양과 다른 행성들을 연결하는 천체가 있다. 수성(水星)이다. 영어로는 ‘머큐리’라고 불리는 ‘메르쿠리우스’다. 고대 로마의 한 지역과 다른 지역 사이에는 돌로 된 장승이 서 있었다. 라틴어로는 ‘헤르마(Herma)’다. 로마 돌 장승은 헤르메스의 석상(石像)을 도표(道標)로 삼던 그리스 풍속에서 유래한다. 헤르메스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 접속사 같이, 얼굴이 둘인 야누스같이 존재하는 신이다. Hermes, Athenian red-figure lekythos C5th B.C., Metropolitan Museum of Art 그리스 신화에는 천상 천성(天城)과 지하 명계(冥界)의 출입을 자유자재로 하는 신이 있다. 헤르메스다. 그가 들고 있는 ‘카루케이온’(로마식으로는 ‘카드케우스’), 즉 전령장(傳令杖)을 보면, 꼭대기에 독수리가 한 마리 앉아 있다. 독수리는 제우스의 신조(神鳥), 따라서 천계의 상징이다. 이 카루케이온을 두 마리의 뱀이 감고 오른다. 지하 출입이 자유자재인 뱀, 곧 명계의 상징이다. 모자, 혹은 투구 옆에는 한 쌍의 날개가 달려 있다. 신발에도 한 쌍의 날개가 달려 있다.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신조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 수도 있고, 죽음의 상징이자 재생의 상징인 뱀처럼 지하로 숨어들 수도 있다. 헤르메스는 사건을 알지 못하는 독자와, 독자를 알지 못하는 사건 사이에 위치하기도 한다. 그의 지팡이 ‘카루케이온(karukeion)’은 ‘케룩스(kerux)’의 지팡이, 영어로는 ‘헤럴드(herald)’의 지팡이, 바로 전령장(herald's staff)이다. 신문의 제명(題名)에 ‘헤럴드’가 많은 것은 신문의 소임이 곧 헤르메스의 소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문이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카루케이온은 최면장(催眠杖)이기도 하다. 헤르메스는, 필요할 경우 이 지팡이로 산 것들을 살짝 건드리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산 것들은 깊은 잠에 빠져든다. ‘헤럴드’의 지팡이는 전령장이다. 최면장이 아니다. 헤르메스의 신발에 달려 있는 깃털날개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이 깃털날개에서 문학의 가능성을 읽었던 모양이다. 그는 미국 하버드 대학 ‘노펀 렉처’에서, 문학의 가능성은 메두사의 머리와 같은 무거움 쪽이 아니라 헤르메스 신발의 깃털날개같이 가벼운 쪽으로 열린다고 한 적이 있다. 헤르메스는 견딜 수 없이 가볍다. 가볍지 않고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 관계의 연금술사로, 하나의 접속사처럼 존재할 수 없지 않겠는가. 헤르메스는 전령신으로서, 아버지 제우스가 피운 난봉의 뒤치다꺼리를 한 공이 적지 않다. 그러나 아버지 꽁무니에 붙어 다니며 여신이나 요정이나 여자 후려내는 재주를 배우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로써 낳은 자식을 가까이서 보면 아무래도 제대로 배운 것 같지 않다. 헤르메스가 드뤼오프스(‘떡갈나무’라는 뜻)의 무남독녀와 통정하고 낳았다는 아들만 해도 그렇다. 아기의 온몸은 털투성이, 다리는 양(羊)다리였다. 이마에 양뿔까지 솟아 있었다.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실없이 말했다. “드뤼오프스의 딸은 무슨 딸? 떡갈나무 밑에서 암양을 타고 놀았던 게지.” 헤르메스는 아기를 거두고, 토끼 가죽에 고이 싸서 올륌포스로 데리고 가서 길렀는데, 이 아이가 바로 신들이 놀리느라고 ‘판(Pan)’, 즉 ‘우주의 모든 것’이라고 부른 아이다. ‘사튀로스(Satyr)’라고 불리기도 한다. ‘범아시아적(pan-asian)’, ‘범우주적((pan-cosmic)’ 할 때의 한자 ‘범(汎)’은 이 ‘판’의 음역(音譯)이다. 판, 혹은 사튀로스는 인간과 짐승 사이에 위치한다. 인간이 짐승처럼 구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지만 위대한 창조의 순간을 맞는 인간에게 범하지 못할 법칙이 없겠다 싶다. 이탈로 칼비노가 옳다. 헤르메스의 자식들인 판, 혹은 사튀로스는 견딜 수 없이 가볍다. 판은 술과 여자를 좋아해서, 취하면 여성을 그냥 두지 않는다. 여성들에게 판, 혹은 사튀로스와의 만남은 ‘공포(Panic)’와의 만남이다. 이 경망스럽기 그지없는 사튀로스(Satyr)가 뱉어내는 언어가 ‘새타이어(satire)’, 곧 풍자(諷刺)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판, 혹은 사튀로스 식으로 뱉어낸 야유의 현하(懸河), 그것이 ‘걸리버 여행기’다. 문학은 그런 강으로 오래 흘러왔다. 헤르메스의 지팡이 (Caduceus) 설 명 건드리기만 하면 누구든 재웠다 깨웠다 할 수 있는 최면장 카두케우스는 아폴론이 헤르메스에게 주었다. 헤르메스는 키오네라는 여인을 훔친 일이 있는데 여기에서 태어난 아들도 걸작이다. ‘아우톨뤼코스’라는 이름을 얻은 아들은 아버지의 훔치는 재주를 그대로 물려받았던지 뒷날 유명한 도둑이 되었다. 그가 훔치려고 손만 대면, 물건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정도였다. 목마(木馬)를 만들어 트로이아를 쑥대밭으로 만든 영웅 오디세우스는 바로 천재 도둑의 자손이다.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척박한 땅 그리스 사람들에게 훔치는 일은 유통시키는 일이었다. 그리스는, 특히 그리스와 아프리카 사이에 위치하는 크레타 섬은, 고대 아프리카와 고대 유럽을 잇는 무역의 중간기지, 아프리카 문명으로써 고대 그리스의 크노소스 문명을 빚어낸 소통의 중심이었다. 이집트 신화체계를 비롯한 고대 아프리카 문명도 훔치고, 트로이아도 훔쳤던 그들의 땅은 고대 세계의 중심이었다. 적어도 로마 제국이 훔쳐가기까지는 그랬다. 유부녀 아프로디테와 아레스가 간통현장에서 알몸으로 그물에 갇힌 채 신들의 눈요깃거리가 되었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자네도 아프로디테와 알몸으로 갇혀 보고 싶겠지, 이렇게 묻는 아폴론에게 헤르메스가 한 말이 걸작이다. APHRODITE, HERMES, EROS Museum Collection: Museum of Fine Arts, Boston, Massachusetts, USA Catalogue Number: 1989.100 Beazley Archive Number: N/A Ware: Apulian Red Figure Shape: Krater, calyx Painter: The Darius Painter Date: ca 340 - 330 BC Period: Late Classical SUMMARY Side A: Detail of Aphrodite, Hermes and Eros seated in heaven in a painting depicting the story of Alkmene on the pyre. “그물이 세 갑절쯤 질겼으면 좋겠소.” 아프로디테가 그 말을 잊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느날 감람나무 밑에 누워 날벌레 기다리는 거미를 올려다보다 깜빡 잠이 들었던 헤르메스는 배 위로 심상치 않은 무게를 느끼고는 눈을 떴다. 눈을 뜨고 올려다보니, ‘아프로디테 포르네(음란한 아프로디테)’가 이름 값을 하고 있었다. 헤르메스는 감히 청하지 못하였을 뿐 사실은 목 늘이고 바라던 바이라, 아프로디테의 사랑을 거절하지 않았다. 헤르마프로디토스(밀롬作) 설 명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원래는 남자였는데 그를 짝사랑한 님페 살마키스 때문에 그녀와 동화되어 남성과 여성의 특징을 모두 갖춘 양성체임. 누운 헤르메스로부터 엎드려 씨를 받은 아프로디테가 아들을 낳으니, 이 아들이 바로 헤르마프로디토스(헤르메스+아프로디테), 곧 어지자지, 남녀추니, 양성인(兩性人)이다. 헤르메스 아들 판이 사람과 짐승 사이에 위치하듯이,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 위치한다. 헤르메스를 사람들은 ‘통변(通辯)의 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언어와 저 언어 사이에는 그가 있다. 그는 고등(高等)한 통변, 해석학(解釋學·hermeneutics)의 신이기도 하다. 헤르메스는 이 땅에 부활해야 할 신이기도 하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 흑백논리의 군비경쟁이 치열한 바로 이 땅에 부활해야 할, 견딜 수 없이 가벼운 변증법의 신이기도 하다. 부활시킬 수 있다면 나는 그에게 희망을 걸겠다. <이윤기, 작가> |
|||||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