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메테르 이야기
작성자 이복근 (211.♡.20.21)
■ 페르세포네의 슬픈 운명

옛날 대지의 여신 가이아(Gaea)는 거대한 괴물을 여럿 낳았다. 이 괴물이 바로 ‘기가스(Gigas)’다. ‘가이아의 자식’이라는 뜻이다. 기가스의 무리를 ‘기간테스(Gigantes)’라고 하는데,거인 혹은 위인을 뜻하며 영어 ‘자이언트(giant)’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 기간테스가 제우스에게 정면으로 도전한 적이 있다. 올륌포스 신들이 이들을 잡도리, 거대한 산으로 눌러놓았다. 기간테스는 이따금씩 산이 너무 무거워 몸을 뒤척이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진이란다. 그런데 기간테스 중 하나의 몸부림은 땅 거죽은 물론이고 땅 밑에 있는 저승까지 뒤흔들었다. 저승신 하데스는 날마다 좌불안석이었다. 그러다 대지가 갈라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날빛이 저승으로 비쳐들어 망령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터였다. 하데스는 검은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땅으로 올라왔다. 그는 땅으로 올라와도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퀴네에(Kynee)’라고 하는 도깨비 감투를 쓰고 다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들 눈에는 보인다. 애욕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아들인 사랑의 신 에로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아테나와 아르테미스가 순결을 고집하고 있다만, 신들과 인간의 세계는 우리 애욕과 사랑이 거의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저승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니 저승 왕이라고 거들먹거리는 저 자에게 사랑의 화살을 한대 날리거라.”

루벤스-페르세포네의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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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화살에 맞으면 신이고 인간이고 처음 보게 되는 이성(異性)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하데스의 눈에 처음 띈 이성은 바로 땅과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였다. 처녀가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자 하데스는 처녀를 우격다짐으로 끌고가려고 했다. 처녀는 울면서, 함께 꽃 따러 나온 동무들 이름보다는 어머니 데메테르를 더 많이 불렀다. 처녀가 몸부림치는 바람에 허리띠는 풀어지고 치맛말은 찢겨나갔으며, 거기 따 담았던 꽃은 우수수 땅바닥에 떨어졌다. 어리고 순진한 처녀는 꽃 떨어지는 것을 보고 또 울었다.

요정 퀴아네가 마차에 실려가는 처녀를 알아보고 감히 하데스에게 애원했다.

“안됩니다. 데메테르 여신께서 원치 않으시는 바에, 신께서는 결단코 그분의 사위가 되실 수 없습니다.” 퀴아네는 하데스의 앞길을 막았다. 하데스는 역정을 내면서 고삐로 말잔등을 치는 동시에, 손에 든 저승의 왕홀(王笏)로 땅을 쳤다. 그러자 땅이 갈라지면서 저승 가는 길이 열렸다. 하데스는 저승으로 내려갔고, 퀴아네는, 끌려가는 페르세포네가 불쌍해서 한없이 울었는데 어찌나 울었던지 슬픔이 요정의 육신을 녹여 물로 흐르게 했다. 요정의 사지가 녹기 시작하자 뼈와 손톱 발톱도 흐물흐물해졌다. 맨먼저 늘씬하던 몸이 녹았고, 이어서 검은 머리카락, 손가락, 다리, 발이 차례로 녹아서 물이 되었다. 물이 된 퀴아네는 페르세포네의 치맛말을 주워,데메테르가 볼 수 있도록 물 위에다 띄웠다.

이로써 곡물의 여신 데메테르의 기나긴 드라마 ‘딸 찾아 3만리’가 시작된다. 곡신(穀神)의 딸 페르세포네의 운명은 무엇의 운명이겠는가. 씨앗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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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의 여신 데메테르와 신비의 횃불을 들고 있는 그 딸 페르세포네가 젊은 트리프톨레모스에게 성화하고 있다. 트리프톨레모스는 아티카 출신으로 데메테르가 곡물과 농업의 기술을 전세게에 전파할 사람으로 택한 사람이었다.
이 부조 작품은 엘리우시스 제전(Eleusian mysteries)장소인 엘리우시스에서 발견되었다


■ 물 많은 여신 데메테르

데메테르(Demeter)는 땅의 여신이기도 하다. ‘데메테르’라는 말은 ‘땅(da)의 어머니(mater)에서 유래한다. 그대로 번역하면 ‘지모(地母)’의 여신이다. ‘다’는 ‘하늘천(天) 따지(地)’ 할 때의 우리말‘ 따’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파키스탄, 힌두스탄, 우즈베키스탄 할 때의 ‘스탄(stan)도 ‘땅(land)’이라는 뜻이다. 옛말 좇다가 가끔 놀라는 대목이다.



내가 8년간 머문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의 수호여신은 ‘마그나 마테르(Magna Mater)’, ‘큰 어머니’라는 뜻이다. 그리스의 곡물 및 생육의 여신 퀴벨레(Cybele)의 별명이다. ‘큰 어머니’를 상징 이미지로 삼은 것과, 이 학교가 세계 최대의 농과대학을 보유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이 퀴벨레의 뒤를 이어 등장하는 땅 및 곡물의 여신이 바로 데메테르다. 이 여신의 로마 이름은 ‘케레스(Ceres)’,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시어리스’다. 미국인들은 거의 매일, 요즘 우리 어린이들도 곧잘 우유에다 타먹는 ‘시리얼(Cereal)’은 ‘케레스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미국 최대의 켈로그 시리얼 공장이 있는 미시간주 남단 도시 배틀크리크의 별명은 그래서 ‘아메리카 보리죽 사발(American Cereal Bowl)’이다. 데메테르에게는, 사경을 헤매며 딸을 찾아다니다 보리죽 한 사발 얻어먹고 허기를 면한 눈물겨운 사연이 있다.


[그림]Peter Paul Rubens (獨, 1577-1640) ◈ Statue of Ceres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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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테르는 풍년과 농업, 특히 밀농사의 여신. 뜻은 "보리 어머니". 케레스라고도 한다


데메테르의 성도(聖都) 엘레우시스(Eleusis)는 아테나 여신의 성도 아테네에서 20㎞쯤 떨어져 있다. 이 항구도시의 지금 이름은 ‘엘렙시나(Elefsina)’, 옛이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곳은 ‘엘레우시스 밀교(Eleusian Mystery)’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고대 그리스의 가장 큰 명절이었던 데메테르 축제일이 오면 수천명의 밀교도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제사가 끝나면 밀교도들은, 신전에서 20㎞ 떨어진 아크로폴리스의 아테나 신전가지 도보로 행진했다. 그들은 이 길을 ‘히에로드로모스(Herodromos)’, 즉 거룩한 길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제의(祭儀)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누구든, 이 제의에 참가한 사람으로서 그 내용을 누설하면 죽음을 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저승(죽음)과 씨앗(썩음)및 곡식(부활)의 운명과 관련된 축제였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포도주의 신 디오뉘소스(썩음 및 부활)와 관련이 깊은 이런 제의에서라면 신도들은 치사량의 술을 마셨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도 열리는 다프네의 포도주 축제가 그 제의의 흔적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다프네(월계수)마을은 엘레우시스에서 아테네쪽으로 12㎞ 떨어진, ‘거룩한 길’가 마을이다. 8월 말부터에 벌어지는 ‘다프네 축제’는 오후 7시 반에서 다음날 자정 직후까지 벌어지는 무제한 마시기 잔치. 입장료 약 9000원만 내면 된다. 목숨을 잃는 사람도 간혹 있단다. 그렇다면 광적인 포도주 축제가 왜 이곳에서 벌어지는 것일까. 주신(酒神) 디오뉘소스의 광적인 신도들이 월계수 잎을 씹으면서 미친 듯이 포도주를 마시던 제의의 흔적이라는 주장도 있고, 엘레우시스 밀교의 흔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림]Frederic, Lord Leighton (英,1830-1896)◈The Return of Persephone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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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세계로부터 돌아온 딸 페르세포네를 반기는 케레스.
은은한 색채와 함께 어머니의 강한 모성애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곡신 데메테르의 성도(聖都)에서, 아테나(공업의 여신이기도 하다)의 성도에 이르는 ‘거룩한 길’을 통해 그리스인들은 농업에서 공업으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올라 갔던 셈인가. 지금 엘레우시스는 공업도시로 되어 있고, 신전은 팝뮤직 공연장이 되어 있다. 데메테르 신전 하늘은 메케한 연기로 뒤덮여 있고 거룩한 길은 날마다 난폭한 컨테이너 트럭에 유린당한다. 내가 방독면을 쓴 오토바이 운전자를 처음 본 곳도 엘레우시스에서다. 엘레우시스에서 맞은 비는 데메테르의 눈물 같았다. 데메테르는 눈물이 많은 여신이다. 여신의 신전을 찾아간 날, 진도 6이 넘는 지진이 인근을 강타했다.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그들에게 나는 왜 그렇게 잔인한 농담이 하고 싶었던지.

“‘기가스’가 몸을 뒤척이고 있을 뿐이오. 당신네들이 그러지 않았어요?”

<이윤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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