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는 울산 문화유산]서양 종교건축 수용·정착과정 한눈에-언양성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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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복근 (211.♡.20.21) | 작성일 | 08-04-10 20:39 | ||
울산 최초의 근대건축물 언양성당. 서구 종교건축의 수용과 정착 과정을 보여주는 건물로 알려져 있다. 1936년 건립 울산 최초 근대건축물 고딕양식 본관 맞배지붕 석조건물 사제관은 신앙유물전시관으로 활용 목숨을 내 건 믿음! 이 믿음이 신념이든 신앙이든 간에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싶다. 그들의 믿음 원천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오늘 '영남지역 천주교 신앙의 출발지'인 언양성당에 간다. 언양성당은 1936년, 울산에서 최초로 세워진 근대건축물로 부산교구 내에서는 두 번째로 설립된 본당이다. 우연인지 아니면 마음먹고 찾은 탓인지, 매번 일요일에 언양성당을 찾게 된다. 그것도 미사가 한창인 시간에. 지난 번 성당을 찾았을 땐 제법 날이 쌀쌀했었는데, 오늘은 햇살이 따스하다. 성당 주차장에 다다르면 하이얀 마리아상이 포근한 햇살을 받으며 우리를 맞이한다. 성당 안에서는 미사가 한창이라, 혹여 방해될세라 조심조심 발을 옮긴다. 본당과 사제관을 돌아보기 전에 지난번 오르지 못했던 성모동굴에 오르기로 했다. 햇살을 품에 안은 산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저 '산 중턱 어드메 쯤에 있겠거니' 생각했다. 다가섬의 마음가짐이 잘못되어서일까? 함께 한 친구는 "나, 힘들어"를 연발한다. 언제 불이 난 것일까. 듬성듬성한 잔목에 불에 그을린 줄기만 남은 나무의 어울림이 이채롭다. 그 옛날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가 걸었을 법한 길을 우리도 숙연한 마음으로 걷는다. 천천히…. 그렇게 성모동굴에 닿았다. 간단히 미사를 볼 수 있게 마련된 둥근 통나무 의자에 앉아 언양 읍내를 내려다 본다. 탁 트인 시야에 눈이 시원하다. 길 잃은 동행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본당으로 내려왔다. 본당과 사제관(현재 신앙유물전시관) 주위를 돌아보니 울산에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근대건축물로서 의미가 깊다. 시간을 안은 석재와 붉은 벽돌이 인상적이다. 본당은 맞배지붕을 가진 고딕 형식의 석조 2층 건물로, 울산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일제 강점기 때 서구에서 유입된 종교 건축의 수용과 정착 과정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건물로 알려져 있다. 본당 옆 사제관은 본당을 건축하면서 같은 형태로 지은 건물이며 경사지에 지어서 반지하층을 가지게 되었고 그곳은 현재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지붕에는 3개의 돌출 창과 굴뚝이 있다. 출입은 뒤쪽에서 앞으로 돌아서 진입하게 되어 있으며 내부는 큰 보수 없이 건축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건물 안팎이 건립 당시의 원형 그대로란다. 오늘도 신앙유물전시관은 잠겨 있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사무실을 방문하여 열쇠를 가져올 만큼의 신앙심이었다. 오래된 사제관 난간에 기대어 사진 몇 장을 찍고, 본당 뾰족탑을 배경으로 또 몇 장의 사진을 더 찍는다. 담을 수도 없는 무언가를 담기 위해 연방 사진기 셔터를 눌러댄다. 얼마 전 숭례문 화재에서 경험했듯이 건축문화재는 쓰임은 물론이거니와 그 자체가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더구나 영적인 세계를 담는 역할을 하는 종교 건축물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현재 언양성당 역시 그러하다. 본당과 사제관 건물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크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그 역사는 더욱 깊어진다. 16세기 말 우리나라에 소개된 뒤 한국 천주교는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경신박해(1860), 병인박해(1866)로 이어지는 시련을 맞았다. 그런 가운데 조선후기 영남지역은 천주교박해 이후 은거지, 피난처였다. 박해 이전에 이미 언양의 향반과 향리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언양 지역은 병오박해 때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간월공소에 새 강당을 신축(1858~1859)할 정도로 천주교가 활기를 띠었다고 한다. 언양의 신자촌이 큰 피해를 입기 시작한 것은 경신박해 이후인 듯하다. 이후 천주교인들은 죽림이나 안살티, 두서, 두동 및 청도의 구룡과 경산 자인골 등에서 숨어 지내며 신앙을 지켜냈다.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고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천주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피난 갔던 신자들은 안살티로 모여들어 신자촌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1888년, 언양 본당 설립을 위한 기성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1927년에 가서야 공소 16개를 가진 언양 본당이 창설되었다. 지금의 언양 본당 및 사제관이 축성된 것은 1936년의 일이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의 신앙을 지킨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게다. 앞서 언양성당에 내디딘 첫 발도 성당안 주차장이었듯이, 성당 문을 나서는 길 역시 승용차 안이다. 뭔가 놓치고 가는 듯한 인상을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타인의 집을 방문할 때 겸손한 자세로 대문과 현관을 조심스럽게 들어서듯이 이 곳 역시 그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경솔함에 마음이 불편했나 보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간 선배에 대한, 그리고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타인의 신앙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니겠는가. 또 다시 이런 무례를 범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오후의 남은 일정을 위해 발길을 돌린다. 글·사진=내림터사랑 윤지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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