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읽는다]신라 뒤흔든 세기의 로맨스 이곳에서 탄생하다 - 요석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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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복근 (211.♡.26.116) | 작성일 | 08-11-25 18:53 | ||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요석궁의 본채는 건축한지가 100여년이 훨씬 지났지만 마루가 넓고 깨끗해 한옥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 교동에 있는 요석궁은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로맨스가 남아 있는 유적지다. 그러나 요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요석궁을 관람 할 수가 없다. 이곳은 1~2년 전만 해도 식당이긴 했지만 방문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는데 지난해 식당 주인이 바뀌면서 식사를 하지 않고 이곳을 출입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요석공주는 원효와 결혼할 때 이미 과부였다. 요석공주의 첫 남편이 누구였는지, 혹은 언제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신라와 백제 사이에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이 치열했던 것을 생각하면 요석공주가 과부가 된 것은 그의 남편이 백제군과 싸우다가 죽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요석공주를 만날 쯤 원효는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준다면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는 노래를 계속 부르면서 서라벌 시내를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서라벌 사람 모두 이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는데 무열왕이 노래의 뜻을 알아차렸다. 무열왕은 이 노래를 통해 원효에게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여자를 주면 큰 인재를 낳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딸 요석공주와 결혼을 시킬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요석공주가 사가의 딸이 아니다 보니 원효와 결혼을 시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고심 중 무열왕은 딸을 주기위한 묘안을 찾아내었다. 사전에 원효를 만났던 무열왕은 원효에게 요석공주가 살고 있는 인근의 월정교를 지나다가 일부러 다리 밑으로 떨어지라고 권한다. 이 말을 들은 원효는 무열왕이 시키는 대로 했고 이를 지켜 본 궁리가 원효의 젖은 옷을 말려야 한다는 핑계로 원효를 데리고 들어간 곳이 요석공주가 살았다는 요석궁이다. 이후 원효는 요석궁에 머물렀고 얼마 있지 않아 공주가 임신했는데 이때 태어난 애기가 이두문자를 만들어 낸 설총(薛聰)이다. 결과적으로 무열왕의 생각이 맞아 떨어진 셈이다. 요석궁은 지금은 소유주가 다르지만 일제강점기만 해도 최부잣집 장손 최준씨의 동생 최윤씨가 살아 같은 최부잣집 소유였다. 최윤씨는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특이한 것은 한말 의병장을 지낸 신돌석 장군이 그 때 왜병의 눈을 피해 친일파 집이었던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당초 왜병에 쫓긴 신돌석 장군은 최준씨에게 왜병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안가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 때 최씨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권유해 이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신 장군은 이 집에 머무는 동안 많은 전설을 남겨 놓았다. 우선 이집 본채 건물에는 여덟 팔자의 큰 대들보가 있다. 그런데 신 장군이 어찌나 힘이 장사였던지 이 집을 건축할 때 혼자 이렇게 무거운 대들보를 들어 올렸다고 한다. 지금은 한식 전문 식당이 되어 있는 이 집은 70~80년대까지만 해도 경주 최고급 요정으로 전국에서 돈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한잔 술에 취해 원효와 요석공주의 로맨스를 더듬곤 했다. 요석궁의 본채는 건축한지가 100여년이 훨씬 지났지만 마루가 넓고 깨끗해 한옥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한양의 최고 목수가 지은 것이다. 당시 일본 최고의 정원사가 직접 꾸몄다는 정원 역시 동양적인 미를 잘 살려놓고 있다. 정원의 경우 일반적으로 서양식은 분수를 넣어 역동의 미를 보여주는데 반해 동양식은 대신 폭포를 만들어 안정감을 준다. 이 정원은 일본 사람이 만든 때문인지 우리나라 정원과는 외형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정원 중앙에 연못을 파는 등 우리나라 정원의 멋을 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원에 있는 소나무 역시 특이하다. 대부분의 소나무가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멋을 내고 있는데 반해 정문에서 행랑채를 넘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소나무는 나무 자체가 용트림치는 형이다. 그런데 이 소나무의 뒤틀림이 몹시 강해 나무에서 힘을 느끼게 된다. 정원 동쪽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건물이 있다. 당초 이 자리에는 경주 천마총을 연상시키는 건물을 세워 집 전체 분위기와 이 건물이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 건물을 뜯어내고 새 건물을 앉혀 다시 집안 분위기를 살려 놓았다. 안채로 들어서는 중문에는 90년대 까지만 해도 오래된 우물이 있어 혹 신라시대에 판 우물이 아닌가 하는 호기심을 자아내었지만 최근 주인이 묻어 버려 지금은 우물을 볼 수 없다. 무열왕의 묘안을 원효가 실천했다는 월정교도 이곳에서 가깝다. 이 건물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와 왼쪽 반월성으로 고개를 돌리면 다리가 있었던 흔적이 보이는데 이곳에 월정교가 있었다. <삼국사기> 경덕왕 19년(760)조에는 ‘궁의 남쪽 문천에 월정과 춘양 두 다리를 세웠다’고 되어 있는데 월정교는 이 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한다. 이곳에 한꺼번에 두개의 다리가 놓여진 것은 당시 사람들의 신분에 따라 다른 다리를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고 있다 월정교는 최근 발굴되어 남북 양측의 교대는 복원되고 다리의 교각 밑 부분은 남천에 그대로 남아 있다. 교대 간의 거리는 60곒이고 이 사이에 4개의 교각 기초부가 있는데 간격은 12곒씩 된다. 길게 다듬은 장대석의 교각 기초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놓여 있다. 반월성을 감돌아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은 당시와 차이가 없지만 다리에는 상판이 없어 공주와 결혼을 위해 원효가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 내렸던 장소가 어디쯤일까 알 수 없는 것이 궁금하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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