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세포네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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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복근 (211.♡.20.21) | 작성일 | 08-04-08 22:54 | ||
■ 땅과 씨앗, 혹은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딸 잃은 데메테르는 여느 노파로 몸을 바꾸고 미친 듯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딸 찾아 그리스 땅을 두루, 그리고 부지런히 헤맸다. 어찌나 부지런히 헤맸던지 에오스(새벽)도 헤스페로스(초저녁별)도 여신이 쉬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낮 하늘 헬리오스(태양)신이나 밤 하늘 셀레네(달) 여신이라면 처녀의 행방을 알고 있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이승 처녀를 납치해간 하데스는 빠르기로 이름 높다. 저승왕 하데스가 인간을 데려갈 때는,소매치기가 훔친 지갑을 숨기는 것만큼이나 빠르다. 죽음이 그와 같다. 지칠 대로 지친데다 슬픔으로 몸을 가눌 수 없게 된 여신은 방석 돌 위에 털썩 주저앉아, 흐르는 비까지 그대로 맞으며 아흐레 밤낮을 보냈다. 지금의 엘레우시스 근방이었는데, 당시 여기에는 켈레오스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어린 딸과 함께 산양 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노인은 여신에게 물었다. “무슨 사연이 있어 이렇게 혼자 돌 위에 앉아 계시나요?” 노인은 여신에게 오두막이긴 하지만 쉬어갈 것을 청했다. “내 걱정 말고 가시되,딸이 곁에 있는 것을 큰 복으로 여기세요.” 여신의 눈물이 볼을 타고 가슴으로 흘러내리자 마음 여린 노인과 딸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여신은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으나 노인이 여러번 청하는 바람에 결국 노인 뒤에 묻었다. 걸으면서 노인은, 집에 외아들이 있는데 중병에 걸렸는지 열이 나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얘기를 했다. 여신은 허리를 구부려 양귀비 열매를 몇개 주웠다. 노인의 오두막은, 아이가 소생하지 않을 것 같았던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여신이 병든 아이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자 창백하던 얼굴에서 화기가 돌기 시작했다. 식구들은 모두 기뻐했다. 아이 어머니가 지치고 허기진 여신을 위해 보리죽을 끓일 동안 여신은 아이에게 양귀비 열매즙을 섞은 우유를 마시게 했다. 밤이 되어 사위가 조용해졌을 무렵 여신이 살며시 일어나 아이를 껴안고는 아이의 팔다리를 주무르고 화로의 재를 파고 아이를 눕혔다. 아이 어머니는 소피 보러 나오다가 여신이 하는 짓을 보고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나와 불 속에서 아이를 끄집어내면서 소리쳤다. “남의 자식 태워죽여야 딸 잃은 슬픔이 가시오? 보리죽 아까워서 이러는 것은 아니오만, 보리죽 값을 이렇게 하는 법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이오!” 그말 듣고 여신은 딸을 잃은 이래 처음으로 웃었다. 여신이 웃자 천상의 빛무리가 방을 비추었고 천궁의 향내가 방을 채웠다. “네가 아이 어미라면 나는 ‘다’(땅)의 ‘마테르’(어머니), 데메테르다. 자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오히려 자식에게 못할 짓을 하고 말았구나. 보라,지나친 네 사랑이 아들이 갈 영생불사의 길을 막았다. 너는 의신(醫神) 아스클레피오스가 잿더미가 된 어미 몸에서 나왔다는 소리, 주신(酒神) 디오뉘소스가 불길에 타다 남은 어미 몸에서 나왔다는 소리도 듣지 못하였느냐? 너는 포에니코스(不死鳥)가 향나무 재 속에서 날아나온다는 말을 듣지도 못하였느냐? 하지만 이 집에서 보리죽 한 사발 얻어먹은 은혜를 잊지는 않겠다.” 말이 끝나자 여신은 구름에 둘러싸이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신이 마침내 이른 땅은 딸이 납치당한 현장인 강둑이었다. 강물이 된 요정 퀴아네는 제 눈으로 본 것을 남김없이 여신에게 들려주고 싶었으나 하데스가 두려워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래도 그냥 있자니 여신이 너무 딱하게 보여, 처녀가 끌려가면서 떨어뜨린 치맛말을 여신의 발 밑으로 떠오르게 했다. 여신은 딸의 죽음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는 여신은 죄 없는 대지에 죄값을 물리려고, 배은망덕하다면서 땅을 저주했다. 그러자 곡식은 모두 말라죽었고, 쟁기는 이랑을 파다 부러졌으며, 씨는 싹을 틔우기도 전에 새의 먹이가 되었다. 땅 위에는 가뭄이 계속되었다. 가뭄 때문에 말라가던 샘, 땅속 깊은 곳에서 솟던 샘의 요정 아레투사가 여신에게 귀띔했다. ......그리고 페르세포네는 석류를 먹었다. “대지를 나무라지 마소서. 대지는 어쩔 수 없어서 따님이 지나갈 길을 열어주었을 뿐입니다. 따님은 저승왕비가 되어 저승에 계십니다.” 이 말을 들은 여신은 수레를 천상으로 몰았다. 제우스 보좌 앞으로 나아간 여신은 전후 사정을 고하고, 딸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탄원했다. 제우스는 청을 수락하면서 조건을 하나 달았다. 페르세포네가 저승에 있을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았어야 되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운명의 여신들이 지어낸 법이었다. 제우스의 명을 받은 헤르메스가 ‘봄의 여신’을 데리고 저승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페르세포네는 하데스가 갖다준 석류를 받아 알맹이의 과즙을 먹은 뒤였다. 하필이면, 때가 되면 저절로 벌어지는 석류라니! 따라서 데려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우스는 페르세포네에게 1년의 반은 어머니 데메테르, 나머지 반은 지아비 하데스와 살게 하자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데메테르는 이 타협안을 받아들여, 거두었던 은혜를 다시 대지에 베풀었다. 켈레오스의 아내에게 했던 약속도 지키기로 하고 그 아들 트리프톨레모스(세번 쟁기로 가는 자·三重戰士)가 성장하자 쟁기 쓰는 법, 씨뿌리는 법을 가르치고, 비룡(飛龍)이 끄는 수레로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귀중한 곡물이나 농업에 대한 지식을 인류에게 베풀어 가르치게 했다. 땅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이 무엇이겠는가? 신화학자들은 페르세포네의 운명을 씨앗의 운명으로 해석한다. 씨앗(대지의 딸)은 땅(하데스)속에 묻힘으로써 그 모습을 감추(납치당하)지만 봄이 오면 다시 데메테르(땅)에 모습을 드러낸다. ‘봄의 여신’이 다시 페르세포네를 날빛 아래로 데려오는 것이다. ■ 신화와 약장수 우리말 ‘신화’에는 두가지 쓰임새가 있다. 첫째는 글자 그대로 ‘신들과 관련된, 역사적 근거가 없는 설화’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 둘째는 이 첫째 ‘신화’와 유사한 정도로,말하자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일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다. ‘대우 신화’ ‘현대 신화’ 따위의 말에서 ‘신화’의 쓰임새는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하지만 영어의 신화를 뜻하는 ‘미스(myth)’에는 한가지 쓰임새가 더 있다. 지난해 미국에서 그리스로 두번째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안내 책자를 읽다가 실소한 적이 있다. ‘그리스인들의 친절에 대한 평판은 미스(myth)가 아니다(The Greeks reputation for hospitality is not a myth)’는 문장을 읽고 난 직후였다. 이때의 ‘미스’는 곧 ‘거짓말’이다. 그러니까 이 문장은, ‘그리스 인들이 친절하다는 소문은 거짓말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그렇다. 신화는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다. 따라서 거짓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짓말은 거짓말이되 원초적인, 매우 그럴듯한 거짓말이다. 신화의 나라를 안내하는 책자가 ‘신화(myth)’를 ‘거짓말’과 동일시하고 있어서 실소하고도 나는 그리스로 날아갔다. 거짓말이지만 아무래도 그럴듯한 거짓말, 인간의 꿈과 진실을 담고 있는 거짓말 같았기 때문이다. 신화 작가는, 장거리 약장수와 비슷한 데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화 작가들은 세상 이치를 명징하게 설명할 어휘를 준비하고 있지 못하다. 장거리 약장수는 손님들에게 약의 성분 및 효능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어휘를 준비하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손님을 끌어들이고 붙잡아놓기 위해 약과는 무관한 일들을 벌인다. 언필칭 성동격서(聲東擊西), 소리는 동쪽에서 지르고 치기는 서쪽을 치는 것이다. 신화 읽기 체험에는 장거리 약장수 체험과 비슷한 데가 있다. 장거리 한쪽에서 ‘홍도야 울지마라’가 구슬프게 들려온다. 나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을 차례로 듣고, 원숭이 묘기와 차력 시범도 구경하고, 약 한병 사들고 돌아온다. 신화읽기 체험과 약장수 체험에 다른 것이 있다면, 전자는 우리 정신에 뼈가 되고 살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후자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것이다. <이윤기-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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