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봉 교수 울산, 이야기 속으로]깎아지른 층암절벽 병풍 삼아 백룡담 가운데 유유자적
작성자 이복근 (211.♡.21.44)
(15) 태화강 선바위(立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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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나원찬

선바위 '승려-처녀'전설 울산유사에
가뭄 때마다 관에서 기우제 지내기도
이원담 후손들 용암정 짓고 풍류 즐겨


선바위는 순수한 우리말 지명이다.

입(立)은 설입, 암(岩)은 바위암, 곧 서 있는 바위가 '선바위'인 것이다.

입석(立石)을 '선돌'이라 부르듯이 그 얼마나 정감이 드는 말인가.

우리는 순수한 우리말 지명을 한자지명으로 고쳐서 오히려 옛 이름의 뜻과는 엉뚱한 결과를 빚은 예가 한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입암(立岩)'을 '선바위'로 부르는 것이 좋다고 본다.

이 선바위에 대한 전설이 울산유사(蔚山遺事)에 실려 있다.

읽어 보면 이 전설을 채록하여 문헌에 옮길 때 채록자가 소설을 쓰듯 문장을 꾸며, 전설의 맛이 나지 않는 글로 정착시켜 놓았다.

전설은 증시(證示)의 현장성이 있는 신화적인 이야기인데도 말이다.



전설의 내용은 이렇다.

"옛날 한 미모의 처녀가 있었는데, 동냥 하러 마을을 찾은 중이 그 처녀의 미모에 매료되어 곡물을 전하는 처녀의 손목을 잡고 말았다. 당황한 처녀는 중을 호되게 꾸짖었다. 그 후 그 중은 다시 한 번 그 처녀를 보고자 빨래터인 태화강의 숲에 숨어 있었다. 그 때 큰 바위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본 처녀가 '바위도 장가를 가나봐' 했다. 그 바위가 점점 처녀 쪽으로 다가가자 위기를 느낀 중은 처녀를 구출하고자 강물에 뛰어들었다. 바위는 그 처녀와 중을 덮쳐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그 뒤 날이 궂으면 강 아래쪽에서 중의 원혼이 슬피 울었다."

여기서 바위는 중의 파계(破戒)를 막기 위함이며, 또한 처녀의 정절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중과 처녀가 야합했다는 전설은 아니다. 얼마나 의롭고 숭고한 이야기가 담긴 선바위의 전설인가. 그러므로 전설을 정착시키는 채록자의 자질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이 선바위로 이어지는 상류의 절벽과 망성(望星)의 계류(溪流)로 이어지는 절경이 훌륭하기 때문에 이곳을 울산12경의 하나로 지정했다.

특히 선바위의 꼭대기로 뛰어 오를 정도로 가까운 언덕에 정자(亭子)가 하나 있다. 옛날 울산 부사를 지낸 이정인(李廷仁)이 정조(正祖 20년) 때 이곳에 정자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그 후 이원담(李元聃) 선생의 후손이 선바위의 자연과 용담(龍潭)에 걸맞는 이름인 용암정(龍岩亭)이란 정자를 세워 지금껏 후손들이 정자를 지켜오고 있다.

이 선바위는 감도는 회속(回速)이 심하여 누구도 가까이 접근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곳의 깊이는 명주실 한 꾸리가 다 들어갈 정도라는 말도 전해온다. 그리고 이곳에는 백룡(白龍)이 지금도 살고 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발(旱魃)이면 반드시 관(官)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이곳에서 지냈다는 기록이 신증(新增)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전한다.



이원담(李元聃)은 모두 5형제이다. 첫째가 현담(玄聃·1682~1752· 자는 상로 尙老, 호는 菊翁)인데, 한학자였다. 그는 문필에 뛰어나 유림의 소수(疎首)로서 소문(疏文)과 선현의 행장을 작성하기에 여일(餘日)이 없었다. 둘째가 원담(元聃·1683~1762·자는 景老, 호는 송옹 松翁)으로, 구강서원장을 지냈으며 학성지(鶴城誌)를 편찬했다. 울산의 사림(士林)을 주도하신 분이다. 셋째가 진담(眞聃·1687~1718·爾標에게 出系)이다. 넷째가 용담(龍聃·1694~1773·자는 雲老, 호는 竹翁)으로 문장이 뛰어 났다고 한다. 다섯째가 구담(龜聃·1700~1768·자는 國老, 호는 栢翁)으로 역시 학자였다.

이 네분의 후손들이 이 용암정에 모여 화전(花煎) 또는 시회(詩會)를 자주 가졌는데, 그 때 구영리와 선바위마을에는 타성(他姓)이 한 집도 없었다고 한다.

특히 아랫대의 어수는 성균관 생원이었으며, 근세에 가산(可山· 휘 雲洛)의 고종(姑從)인 문암(文巖) 손후익(孫厚翼)은 경주(慶州)에서 으뜸가는 대학자여서 후학들이 그 많은 문집(文集)을 간행했을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문암의 용암정기(龍岩亭記)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이 정자는 백룡담 위에 있다. 입암(立岩)의 제현(諸賢)들이 그의 선조인 송옹(松翁)을 위해 고종(高宗) 20년(1883)에 지은 것이다. 국수봉의 한 지맥이 서로 이어져 동으로 뻗어 나가다가 홀연히 서쪽으로 굽어서 용담에 멈추었다. 문수(文殊)와 연화(蓮花)와 무학(舞鶴)이 다 일어나 마치 손을 모아 읍을 하는 듯 하다. 물은 언양(彦陽)으로부터 내리는 것이 사연(泗淵)에서 반구(盤龜)의 물과 다시 망성(望星)의 물과 만나 용담으로 직입(直入)하는데 우뚝 솟은 바위가 있어 정자(亭子)와 접할 듯 하고, 그 사이로 거룻배가 겨우 통할만 한데, 물결이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방숙(方叔)의 북소리요, 사양(師讓)의 경쇠소리더라. 이곳은 산수 간에 제일이라. 울산의 문학자가 이곳을 최고로 여겨 모두가 공(원담)을 현자(賢者)의 으뜸으로 선정하고 이 정자를 여기에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역사(役事)에 정성을 다 한 사람은 석만(錫萬)이다. 3년 만에 낙성(落成)했다. 또 입암정사(立岩精舍)는 다음에 짓기로 하고 태락(太洛) 군을 보내어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하니 내가 오래도록 입암에서 살았으므로 사람과 지리(地理)에 아는 것이 많은 지라. 청대(淸臺) 권공(權公)과 화계(花溪) 유공(柳公)이 먼저 수례에서 내려 공(송옹)에게 예(禮)와 도(道)로서 사귐을 원하였다. 두 분은 나라의 큰 선비였다. 공(송옹)의 어짊을 이로서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번 높은 자리에 천거하였으나 끝내 사양하니, 사람들이 다 감탄하고 아쉬워하더라. 공은 오로지 4형제와 다섯 아들이 매양 우애와 효로써 가풍을 따르게 하였다. 시조공(始祖公)의 사우(祠宇)를 매양 모시니, 조상의 덕(德)과 공(功)을 알게 하였다. 울산을 '궁마(弓馬)의 고을'에서 '학문의 고을'로 힘쓰게 하였으니, 공(公)의 덕망을 가히 알만 할 것이다. 그는 도림재(圖林齋)를 지어 그 안에서 노후를 보내시다가 기세하셨다. 얼마 후 그 도림재가 불타버렸다. 남은 서적을 구영(九英)과 입암(立岩)이 나누었다. 공의 유업을 어수, 농아(聾啞), 동암(東巖), 가산(可山)이 이었다. 슬프다. 부조(父祖)께서 성력을 기울였고 또 선세가 끼친 뜻을 어렵게 이뤄낸 바를 알게 하여, 한 줌의 흙, 한 조각의 나무라도 훼손치 않으면 정자와 용담과 바위는 영원하리라" 문암의 기문(記文)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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