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네모쉬네와 레테 이야기
작성자 이복근 (2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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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사이가 사는 집

아테네에서, 아폴론의 신탁(神託)으로 유명한 고대 도시 델포이까지는 자동차로 4시간 가량 걸린다. 델포이는 매우 넓어서 박물관 구경과 고대 도시 답사만으로도 하루 해가 짧아서 숙소가 아테네에 있는 여행자에게는 바듯한 여정이다.

따라서 델포이 여행에는 다른 일정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하지만 델포이 못미처 ‘리바디아(Livadia)’라는 소도시가 있다. 거기에 기억과 망각의 샘이 있단다. 리바디아를 답사하지 않을 수 없다. 기억의 샘물을 마시고 싶어서도, 망각의 샘물을 마시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다만, 나쁘게 말하면 허풍이 심한, 좋게 말하면 시적(詩的) 상상력이 풍부한,그래서 방대한 신화 체계를 그려내었을 터인 그들이 무엇을 기억의 샘, 망각의 샘이라고 부르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기억과 망각을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들에게 가볍게 질리고, 무자비한 그리스 땡볕의 신전 돌무더기에 지쳐 있을 즈음이어서 샘이 그리웠다.

그리스 신화는 먼저 ‘기억’을 이렇게 설명한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땅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서는 모두 12남매가 태어난다. 대양(大洋,Ocean)의 신 오케아노스(Oceanos), 태양의 신과 달의 여신의 아버지가 되는 휘페리온(Hyperion, 높은 곳을 달리는 이), 프로메테우스의 아버지가 되는 이아페토스,그리고 제우스의 아버지가 되는 크로노스(Cronus)는 그 아들들이다. 딸들 중에는 이치를 주관하는 여신 테미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가 있다. 므네모쉬네의 이름은 ‘연상 기호코드(mnemonic code)’ ‘기억소(mnemon)’ 따위의 컴퓨터 용어에 남아 있다.

제우스가 고모뻘되는 여신 므네모쉬네(기억)와 동침할 필요를 느낀 것은 거인들(Gigantes)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다. 승리의 축가를 지어야 하는데, 전황과 그 결과를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는 므네모쉬네 여신뿐이었다. 제우스가 아흐레동안 연이어 이 여신과 동침하니, 여기에서 태어난 딸 아홉자매가 바로 무사이(Mousai) 신녀(神女)들이다. 이들이 사는 집은 ‘무사이온(Mousaion)’이라고 한다. 영어는 이들을 ‘뮤즈(Muse)’, 이들이 사는 집을 ‘뮤지움(Museum)’이라고 부른다. 인류가 남긴 기억의 산물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 도서관이 딸린 박물관이다.

[그림]Nicolas Poussin(佛,1594-1665) ◈ Inspiration of the Poet(16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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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영감>은 푸생이 초기에 성취한 걸작 중 하나인데,
'성취'라는 말은 이 작품이 가진 우아함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거친 말인 것 같기도 하다.이 전통적인 느낌의 그림에서
푸생은 서사시의 뮤즈 칼리오페Calliope와 시의 신인 아폴로,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로 뭔가 희구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가난한 시인을 함께 보여 주고 있다.그는 시인으로서 '성공'
(월계관이 성공의 상징이다)하기 위해 '영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무사이 아홉 자매의 면면은 이렇다. 영웅시와 서사시를 관장하는 클레이오는 늘 나팔과 물시계를 들고 다니고, 하늘의 찬양을 관장하는 우라니아는 지구의와 나침반을 든 모습으로 자주 선보인다. 슬픈 가면과 운명의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 비극을 관장하는 멜포메네, 지팡이와 웃는 가면을 들고 다니면 희극을 담당하는 탈레이아, 현악기 키타라를 들고 다니면 합창을 맡는 테롭시코라, 입에 손가락 하나를 대고 명상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면 무언극을 연출하는 풀뤼휨니아다.

이밖에도 서정시를 맡는 에라토, 유행가를 담당하는 에우테르페, 서사시와 웅변에 능한 칼리오페 등이 있다. 옛 그리스 서사시인들이 점수를 매겼으니 그럴 법하거니와 이중 가장 후한 점수를 얻은 신녀는 바로 서사시와 웅변에 능한 칼리오페, 뒷날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가수 오르페오스의 어머니가 되는 바로 그 칼리오페다.

이들은 더러 신들의 잔치자리 말석에서 시와 음악으로 흥을 돋우지만 대개 헬리콘 산에서 지낸다. 헬리콘 산은, 산비탈에는 향나무가 많고 물이 하도 맑아 독사의 독니까지 삭아 없어진다는 곳이다. 이들은 천마 페가소스의 발굽자리라고 전해지는 히포크레네(말의 샘)가에서, 영묘한 시상(詩想)을 떠오르게 하는 그 샘물을 마시고, 자리만 어우러지면 노래부르고 춤을 춘다. 무사이가 태어난 땅은 그리스이지만 지금은 모두 프랑스로 옮겨와 있는 듯하다. 이들의 면면을 알아보지 못하면 파리거리의 조형물은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 망각의 강물, 추억의 슬픈 해독제

이문열의 소설에 ‘레테의 연가’가 있거니와 ‘레테’는 ‘망각의 강’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세 가지의 ‘레테’가 등장한다.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레테가 바로 저승 앞을 흐르는 레테, 즉 망각의 강이다. 저승으로 들어가려면 이 강을 건너야 한다. 이 강을 건너면 이승의 추억을 깡그리 잊는다. 그러니 추억의,슬프고도 아름다운 해독제가 아닌가.

또 하나의 레테는 잠의 신 휘프노스의 동굴 속을 흐른다. 이 휘프노스의 수면관(睡眠館)으로는 햇빛은 해가 하늘로 떠오를 때도,중천에 걸려 있을 때도, 질 때도 비치는 일이 없다. 바닥에는 구름과 그림자가 희미하게 깔려 있다. 이곳에서는 닭이 큰 소리로 새벽의 여신 에오스를 부르는 일도 없고, 눈 밝은 개, 소리에 민감한 거위가 정적을 깨뜨리는 일도 없다. 오직 정적만이 이곳을 지배한다. 그러나 레테(망각의 강)는 속삭이며 흐른다. 그 소리가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잠재우는 것이다. 동굴 입구에는 양귀비와 약초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수면관에는 문도 없다. 문이 있으면 돌쩌귀 소리가 나기 때문이란다.

레테가 하나 더 있다. 망각의 강을 건너고도 이승의 추억을 해독하지 못하는 망령을 위한 레테의걸상(Chair of Oblivion), 저승 신 하데스 앞에 있다. 여기에 앉으면, 이승 추억이 더 이상 망령을 괴롭히지 못한다. 아테네 영웅 테세우스가 여기 앉은 적이 있다. 티륀스 영웅 헤라클레스가 저승에 갔다가, 산 채로 저승으로 들어가 망각의 걸상에 앉은 테세우스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하데스의 권능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헤라클레스는 아틀라스를 대신해서 하늘 축을 어깨로 버틴 천하장사가 아닌가. 헤라클레스는 우격다짐으로 테세우스를 일으켜 세웠다. 테세우스는 일어섰지만 엉덩이 살은 고스란히 걸상에 남았다. 테세우스는 하데스에게 엉덩이 살을 털린 셈인데, 이 전설은 하여튼 둘러대기 좋아하는 그리스 시골 사람들이 약삭빠른 아테네 인들을 ‘뾰족궁둥이(lean bottoms)’라고 놀려먹을 때마다 되살아난단다.

■ 리바디아의 추억

리바디아는 인구 2만이 채 안 되는 소도시지만 ‘트로포니오스의 신탁’으로 제법 유명한 곳이다. 트로포니오스는, 여기에서 40㎞ 떨어져 있는 델포이에다 저 유명한 아폴론의 신전을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신전을 아폴론에게 봉헌하고는 포상을 요구했다. 아폴론은 그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엿새 동안 이 세상의 온갖 즐거움을 다 누리고 살면 상을 베풀겠노라고 했다. 그는 신이 시키는대로 했다. 그러자 이레째 되는 날 밤에 상을 받았는데, 그것은 ‘자다가 죽는 죽음’이었다.

자다가 죽는 죽음, 잠의 신 휘프노스의 동굴 밑을 흐르는 작은 레테(망각)를 통하여 저승 앞을 흐르는 큰 레테를 건너는 일이 아닌가. 리바디아에서 트로포니오스의 신탁을 받으려면 먼저 암산 아래서 솟는 ‘레테의 샘물(Water of Forgetfulness)’을, 다음으로는 바로 그 옆에서 솟는 ‘므네모쉬네의 샘물(Water of Remembrance)’을 마셔야 한다. 그리고는 동굴로 들어가 며칠 동안 망각과 기억을 명상해야 한다.

리바디아의 암산 기슭에서는 맑디 맑은 샘물이, 모래를 헤치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같은 샘인데도,오른쪽에서 솟는 샘물은 ‘므네모쉬네’, 왼쪽에서 솟는 샘물은‘레테’라고 했다. 같은 샘에서 솟은 물은 곧 하나로 어우러져 아래로 흘러 시내를 이루었는데, 척박한 땡볕의 나라 그리스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샘물을 마시고 시내에 손을 담근 일이, 망각의 물 마신 것도 하릴없이 내게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 아름다운 시내를 손가락질하면서 그리스 인에게 시내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짤막했다.

“라이프(인생).”

<이윤기>

참고)무사이는 각각 다음과 같은 아홉 명입니다.



칼리오페(Kalliope) : '아름다운 목소리'라는 뜻. 서사시를 담당. 무사이 중 으뜸이며 펜과 서판을 든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헤시오도스가 <신통기>에서 처음으로 무사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특히 칼리오페를 으뜸으로 꼽은 것은 그녀가 왕들에 대한 이야기를 노래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클레이오(Kleio) : '명성'이라는 뜻. 역사와 영웅시 담당. 두루마리, 나팔, 물시계 등을 가진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에우테르페(Euterpe) : '기쁨'이라는 뜻. 서정시 담당. 피리를 든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테르프시코레(Terpsichore) : '춤의 기쁨'이라는 뜻. 합창단의 춤과 노래 담당. 수금을 든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에라토(Erato) : '사랑스러움'이라는 뜻. 연애시 담당.

멜포메네(Melpomene) : '노래하는 것'이라는 뜻. 비극 담당. 가면과 포도덩굴 관을 가진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탈레이아(Thaleia) : '풍요로운 환성'이라는 뜻. 희극 담당. 웃는 얼굴의 가면이나 목자의 지팡이 등을 가진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폴뤼힘니아(Polyhymnia) : '많은 노래'라는 뜻. 찬가 담당.

우라니아(Urania) : '천공'이라는 뜻. 천문 담당. 지구의와 나침반을 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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