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세우스의 '아름다운 황혼'
작성자 이복근 (211.♡.20.157)
신약성경 '데살로니카 전서'와 '데살로니카 후서'로 유명한 도시 '테살로니키'(현지의 현대 발음)는 그리스의 북부에 있는, 아테네 다음으로 큰 도시다.

바로 이 테살로니키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기묘한 장면을 목격했다.

콧수염을 기른 매표원의 등 뒤에, 그 매표원이 차린 것인 듯한 조그만 제단이 있었다. 제단에는 올리브 등잔이 놓여 있고, 제단 바로 위의 벽에는 성화(聖畵)가 결려 있었다.

성모 마리아 그림, 그리스도 그림… 여기까지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매표원의 아버지 사진도 함께 걸려 있었다. 매표원의 아버지 사진이 성모자(聖母子)의 성화와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매표원의 아버지는 콧수염까지 기르고 있었다. 그리스에서 콧수염은 아무나 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왕좌 마다하고 낮은데로 간 '참 영웅'

발칸반도 여러나라, 가령 그리스, 불가리아, 유고, 알바니아는 남성 우월주의와 아버지 숭배로 유명한 나라들이다.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이 지역은 국가간의 분쟁이 잦았다. 그들에게 이 세상에 믿을만한 것은 칼과 활밖에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칼 쓰기, 활쏘기에 능숙한 남성 또는 아버지는 그저 생물학적인 남성 혹은 아버지에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카잔차키스 소설에 등장하는 한 아버지는 아홉 살바기 아들에게 총을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가족을 지켜야 한다. 나는 앞을 맡을 테니까 너는 뒤를 맡아라. 너는 사내니까.”

알바니아 출신 작가 이스마일 카다레는 알바니아의 기로카스트라 출신이다. 기로카스트라는 그리스 국경에서 30㎞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마을이다. 카다레의 소설 ‘부서진 4월’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이제 네가, 네 형을 죽인 자에게 복수해야 하지 않겠니?”

형의 복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귀가한 아들에게 아버지는 말한다.

“손에 피가 묻었구나, 가서 씻으렴.”

그 희생자의 장례식 하루 전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너는 그 장례식에 참석해야 한다(진정한 사나이는 그러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지 못한다.

콧수염 기른 아버지 영정과 성화가 나란히

남성 우월주의자로 유명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도 수도를 테살로니키로 삼고 있는 마케도니아 사람이다. 그는 총을 가진 남성만이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소설의 무대인 그리스 남부 크레타 섬에 가보면 콧수염을 기른 장년의 사내들이 유난히 많다. 하지만 19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장년의 크레타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수염을 기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콧수염을 기르는 특권은 적을 셋 이상 죽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말하자면 강력한 수컷 성(性)을 과시하는 일종의 훈장과 같은 것이었다. 성모자상과 함께, 콧수염 기른 아버지의 영정(影幀)을 벽에다 걸어놓고 있던 테살로니키의 시외버스 터미널 매표원…. 나는 이런 사람들이 사는 풍토야 말로 영웅이 탄생하는 풍토라고 믿는다.

이런 풍토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아버지에게 강력한 아버지의 이미지, 작은 영웅의 이미지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나약한 가족들의 희망을 외면할 수 없는 아버지들은 스스로 작은 영웅이 되거나 큰 영웅을 만들어 그 휘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고대의 영웅은 나약해서는 안 되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나약할 수밖에 없는 무수한 아버지들 원망(願望)의 투영화(投影畵)다.

오비디우스가 들려주는 ‘페르세우스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은 혼인 잔치 피로연이 싸움터로 돌변하는 대목이다.

괴물 케토스에게 딸을 바칠 수밖에 없는 형편이어서 초상집을 방불케 하던 왕의 궁전은 페르세우스가 그 딸을 구해 돌아오는 바람에 순식간에 혼인 잔치 마당으로 변한다. 물론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의 혼인 잔치다. 하지만 이 혼인 잔치의 흥겨운 피로연 자리는 또 순식간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로 변한다. 안드로메다의 약혼자 피네우스가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왕의 아우, 따라서 안드로메다의 숙부이기도 하다.

'메두사 머리'로 피네우스 군사 무찔러

아우의 무리한 요구에 왕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 아우를 꾸짖는다.

“내 딸을 맞을 생각이 너에게 있었다면 그 아이가 산 제물로 바위에 묶여 있을 때 마땅히 네 권리를 주장하고 네 의무를 다했어야 했다. 신들이 내 딸을 그런 운명에 처하게 하는 순간 나의 의무와 너의 권리는 무효가 되어 버렸다. 죽음은 모든 계약을 무효로 만드는 법이다.”

페르세우스가 지휘하는 왕의 경호대와, 피네우스가 끌고온 200여 군사 사이에 전투가 벌어진다. 투창(投槍)이 어지러이 날고 각궁(角弓)으로 쏜 화살이 왕실 천장을 가린다. 하지만 중과부적이다. 페르세우스는 한동안 불리한 싸움을 버티다 생각한다. “그래, 이적치적(以敵治敵)이다. 내 손으로 벤 메두사의 머리로 새 적을 다스리자….”
F47.1Medousa.jpg
PERSEUS & HEAD OF MEDOUSA

Museum Collection: Museo Archeologico Nazionale di Napoli, Naples, Italy
Catalogue Number: TBA
Type: Fresco, Imperial Roman
Context: Pompeii
Date: --
Period: Imperial Roman

SUMMARY

Perseus with winged brow and feet, raises up the head of the Gorgon Medousa. She has serpentine locks and wings on her brow.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자루에서 메두사의 머리를 꺼내면서 소리친다.

“내 편은 두 손으로 눈을 가려라.”

그리고는 메두사의 머리를 번쩍 쳐든다. 피네우스를 비롯한 폭도들은 하나씩 둘씩 메두사의 머리를 보고는 대리석상으로 변했다.

"운명은 바뀔수 없는건가"외조부의 최후

페르세우스는 신부를 데리고 세리포스 섬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이 섬에서 아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신전의 도피막(逃避幕)에서 나온 어머니 다나에를 해후한다. 셋은 다나에의 고향 아르고스로 돌아가는 길에 라리사라는 도시를 지난다. 마침 그 도시에서는 왕이 부왕(父王)의 기일(忌日)을 기념해서 베푼 원반던지기 경기가 벌어지고 있다.

페르세우스가 여행의 무료를 달랠겸 솜씨를 보여 어머니와 아내가 왕으로부터 환대를 받게 할 겸 이 원반던지기 판에 껴든다. 그러나 페르세우스가 던진 원반은 겨냥을 벗어나 관중석에 앉아 있던 어느 노인의 머리에 맞고 만다. 노인은 달려와 자신을 껴안는 페르세우스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는 숨을 거둔다.

“아폴론 신께서 맡기신 뜻이 옳다면, 너는 다나에의 아들일 것이다. 아, 운명이라는 것은 피한다고 비켜가지는 않는 것인가.” 노인의 말 그대로다. 노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먼 훗날 외손자 손에 죽임을 당하리라던 신탁이 두려워 딸과 외손자를 방주에 가두어 바다에 띄워 보낸 아크리시오스, 바로 그 사람이다. 페르세우스가 세리포스 섬에서 장성하여 메두사의 머리로 궁전을 쑥밭으로 만든 뒤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라리사로 피신해 있던 아르고스 왕 아크리시오스 바로 그 사람이다.

페르세우스는 외조부의 시신을 아르고스 땅에 장사지내고 자신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시민들의 희망을 거절하고 영웅, 혹은 신인(神人)으로서는 참으로 드물게 여생을 아름답게 마친다. 그가 그렇게 여생을 아름답게 마칠수 있었던 것은 왕좌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평민의 지위로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영웅은, 오늘 자신을 십자가에다 달지 않으면 내일은 폭군으로 전락하여 멍석말이가 되는 법이다.

<이윤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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